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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운 표지판
10번 프리웨이 놀만디에 코리아타운 표식 설치함
기사입력  2020/02/28 [05:24] 최종편집    크리스천비전
▲ 만희복지재단 이사장 박형만 장로.     ©크리스천비전


   우리 한인타운의 범위는 매우 좁았다. 1965년 사우스 센추럴 지역의 왓츠폭동으로 백인과 유태인 그리고 일본인 사업가들이 프리웨이 10번 남쪽과 올림픽 지역에서 손을 떼었다. 그 결과 빈터로 남아 있던 그곳에 한인들이 몰려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동서로 넓게 질주하는 올림픽 거리를 중심삼아 버몬트, 8가, 웨스턴, 피코를 연결하는 지역이 그때 코리아타운으로 잡혔다. 인구 3백 50만을 자랑하는 로스앤젤레스 시 정부에서는 1978년 10번 프리웨이의 놀만디에 ‘코리아타운’이라는 표식을 달았다. 밤낮으로 프리웨이를 달리는 사람들에게 한인타운이 탄생한 것을 알리기 위한 간판이었다. 그 주역은 톰 브래들리 시장이었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와서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비즈니스 심장부인 윌셔 지역이 한인 기업가들에 의해 접수되면서 올림픽보다 윌셔를 중심으로 코리아타운이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동쪽으로 알바라도, 서쪽으로 크렌샤, 남쪽으로 제퍼슨, 그리고 북쪽으로 멜로스까지 몇 십 배로 넓어진 것이다. 나는 1973년부터 서독동우회의 발족을 이희덕 씨와 함께 서두르면서 코리아타운번영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올림픽과 하버드 거리가 만나는 남쪽 코너에 이희덕 씨가 부인과 함께 연 올림픽식품점 바로 옆집에 한국서적센터를 차린 김진형 씨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그는 몰고 온 폭스바겐을 보이면서 손을 좀 보아달라고 부탁한 뒤 한인 상가의 번영을 위하여 업소 소유자들이 발 벗고 나서야겠다는 말을 했다. 당연한 제의라며 내가 적극적으로 동의하자 그렇다면 한글 간판부터 적극적으로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점이나 한국 식품점이 아닌 자동차 수리공장인데 한글 간판이 필요하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한글 간판을 달면 동포들은 반가워서 찾아오고 다른 인종이나 민족의 시민들은 한국인의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겠느냐고 대답하였다. 그의 답변은 설득력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본래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국제관광공사 일본 동경지사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뛰어난 비즈니스 맨이었다.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는 그해 2월 7일 코리아타운번영회 발기인총회에 참석하여 8명의 이사 중 한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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